산책길로 새롭게 태어나는 ‘서울성곽’
간송미술관에서 도로를 건너 잠시 오르막길을 오르면 북악산과 인왕산, 남산, 낙산을 잇는 사적 제10호인 서울성곽의 성북동 방향 입구에 다다른다.
성북동에서 종로구 계동으로 이어진 성곽은 산책로로 정비를 마친 상태였다. 야간에는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성곽 주변에 1m 간격으로 조명이 설치돼 긴 띠를 이루는 성곽의 야경도 볼 만하다.
성곽의 비탈에는 보기 아슬아슬할 정도로 오래된 집들이 바로 턱 밑까지 지어져 있었다. 성곽 바로 밑에 살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이 잡초 제거를 하고 있었다.
산책길로 성곽이 조성되면서 야간에는 성곽 둘레에서 조명이 켜진다. 꽤 오랫동안 공사를 했지만 관리가 잘 안돼 잡초가 조명을 감싸면서 미관을 해친다고 한다. 성곽 문화재 관리를 담당하는 분들은 할머니 수고를 좀 덜어주셔야겠다.
서울성곽은 높이가 12m에 둘레만 약 18㎞로 조선왕조 5백년 동안 동대문, 숙청문, 서대문, 남대문 등에 이어진 서울을 지키던 울타리 역할을 하던 곳이다. 태조 때 성벽을 처음 쌓았고, 세종 때 개축하고, 숙종 때 수축해 현재에 이르렀다.
일제 침략기인 1915년에 근대도시의 건설이라는 미명아래 성문과 성벽을 허물게 됐으며 그 결과 삼청동과 성북동, 남산, 장충동 일대에만 성벽이 남게 됐다. 현재는 복원 작업을 통해 옛 모습을 찾고 있다.
시인, 독립운동가의 마지막 안식처 - ‘심우장’
서울성곽에 올라 군사시설에 막혀있는 지점에서 성북동 쪽 샛길로 내려오다 보면 비좁은 옛 집들의 골목길 사이로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말년을 보낸 ‘심우장’이 있다.
안내판은 있지만 진입하는 길이 좁은 골목길로 이어져 있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심우장은 정면 4간, 측면 2간의 장방형 집으로 서울시 기념물 제7호다.
한용운 선생이 남향의 집터를 마다하고 반대편인 산비탈에 북향으로 집을 지은 것은 일제 총독부와 등진 곳에 자리를 잡기 위해서라고 전한다.
심우장의 방 안에 앉아 밖을 내다보니 말년을 보낸 만해 선생이 백담사에서 썼던 ‘님의 침묵’을 읊조렸을 법하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그의 님은 국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그토록 애처롭게 부르짖었던 ‘님’은 이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을까? 잠시 심우장 마루에 걸터앉아 생각해봄 직하다.
문학가가 남긴 옛 가옥 속 찻집 ‘이태준가’
심우장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별장형 주택인 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 성북동 ‘이태준가’도 볼 수 있다. 규모는 작지만 1900년대 개량한옥이 갖는 요소들을 잘 지닌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상허 이태준이 1930년대에 문학작품을 집필하던 곳으로 현재는 후손에 의해 이 집의 당호인 ‘수연산방’이라는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태준 선생이 월북 작가였던 탓에 군부정권 시절에는 거의 폐쇄되던 곳이다. 이후 이태준 선생의 문학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개방되게 됐다. 현재는 이태준 선생의 외손주가 되는 후손에 의해 찻집으로 바뀌었다.
찻값은 보통 7000원 안팎이며 간단한 주류도 팔고 있다. 성북동 탐방을 마치고 잠시 들러 차한잔 하니 피로가 금새 가셨다. 수연산방 후손은 “이 집은 거의 약방이라고 불려도 될 만큼 몇 년 정도 지내면 병이 다 나을 정도로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집”이라고 설명했다.
성북동은 70년대 서울의 모습을 아직까지 볼 수 있어 잠시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과거로 와 있는 듯했다. 좀 더 세심하게 가꾸고 보존해서 앞으로도 타임머신을 타고 종종 나들이를 즐길 수 있었으면 한다.
글 / 구성은 (前 월간 해오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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