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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뒷간/치유를 위한 자전쓰기

2011년까지 나의 가장 행복했던 하루

1991년 크리스마스이브 오후 5시.

성당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전야제 행사 준비가 한창이다. 유치원, 초중고생 학년별로 장기자랑과 노래, 연극 등 다양한 볼거리를 마련했다.

내 나이 17세 고1. 우리 또래도 2주전부터 연극을 준비해왔다. 초등학교 때부터 성당을 같이 다녔던 친구들과 함께 이번에도 참여했다.

연극 내용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대충 청소년기의 방황과 좌절, 극복을 다룬 나름 참신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극~복~!!ㅋㅋ

보통 크리스마스이브에 하는 성경 속 얘기나 예수 탄생을 다룬 것이 아닌 조금은 색다른 내용이다. 방황하던 청소년이 우여곡절 끝에 참된 신앙과 정신 개조를 한다는 뻔한 ‘극복’ 스토리지만…. 한 학년 선배가 시나리오를 쓰고 나는 목소리 크다는 이유로 극복 스토리의 주인공을 했다. 연극 준비는 참 즐거웠다. 그냥 모이는 자체가 즐거운 게 맞겠다.

암튼 연극이 끝나고 성탄 전야미사를 하고 또래끼리 성당 방 한 켠에서 밤을 새우기로 했다. 그동안 마음에 들어 했던 여자애도 남는다니 날아갈 것만 같다. 전기놀이를 하면서 꼭 손 한번 잡아보리라~ 이게 웬걸. 둥글게 모여있는 자리에서 자연스레 내 옆으로 와서 앉는다. 가슴은 조마조마하고 유치하지만 전기놀이를 제안한다. 원 없이 손도 잡았다.

새벽이 다가오자 성당 다니지는 않지만 중학교 때부터 친하던 친구들이 맥주를 들고 방문했다. 그 좁다란 성당의 방 한 켠이 수십명으로 가득 찼다. 별다른 게임도 아니었지만 그 애와 함께 하는 게임과 좋은 친구들…. 더 이상 바랄게 없다.

그러던 중 머리 좀 식히려고 어두운 골방에 들어가 잠시 생각에 잠긴 순간이 있었다. 아직도 기억나는데 이런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앞으로 또 있을까 하는 감상에 빠졌다. 그렇게 20분 이상을 생각하며 앉아있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좋아하던 여자애가 “야, 뭐해 나와서 같이 놀자”고 보챈다. 어두운 방구석에서 보이는 그 애의 눈빛. “알았어. 가자”

그렇게 밤새 하루가 가고 아침에 성탄 미사를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또 생각이 맴돈다. 이런 행복한 날이 또 올까.

그 다음해에도 크리스마스이브는 왔고 친구들과 만났지만 그때만큼 즐겁지 않았다. 또 그 다음해에도, 성년이 되고 나서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때의 크리스마스이브는 찾아오지 않았다. 여자와 어울리는 술자리 건수를 찾으러 다닌 기억이 전부인 것 같다.

나의 가장 행복했던 하루는 다시 올 수 없을까. 매일 사는 게 그날 같다면 더 바랄 게 없을텐데. 뭐 따지고 보면 별거 없는 날이다. 친구들과 뭔가 만들기 위해 즐겁게 준비했고, 행사도 잘 마무리 지었고, 맘에 드는 이성이 옆에 있었고, 좋은 친구들이 함께 밤을 샜고….

괜스레 올해 크리스마스이브에는 그 성당 전야제 행사를 꼭 가보고 싶은 마음이다. 무엇 때문에 즐거웠는지 다시 한 번 곱씹어 봤으면 해서리….

그럼 지금은? 행복한 하루의 기억은 점점 멀어진다. 그걸 잡으려 또 상상한다. 행복의 기억 너머 또 다른 행복한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 지니. 그렇게 또 다독이고 만다.